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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나무 한 그루/안도현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 죽여야겠다고 가을산 중턱에서 찬비를 맞네 오도 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고 너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 단풍나무 혼자서 온몸 벌겋게 달아오르네
단풍의 이유/ 이원규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을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은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람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이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단풍나무 한 그루의 세상/ 이영광
자고 난 뒤 돌아앉아 옷 입던 사람의 뒷모습처럼 연애도 결국은, 지워지지 않는 전과로 남는다 가망 없는 뉘우침을 선사하기 위해 사랑은 내게 왔다가, 이렇게 가지 않는 거다 증명서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교정의 단풍나무 아래 앉아 있는 동안 이곳이 바로 감옥이구나, 느끼게 만드는 거다 사람을 스쳤던 자리마다 눈 감고 되돌아가 한번씩 갇히는 시간 언제나 11월이 가장 춥다 모든 외도를 지우고 단 한사람을 기다리는 일만으로 버거운 사람에게 이 추위는 혼자서 마쳐야 하는 형기? 출감확인서 같은 졸업증명서를 기다리며 외따로 선 나무 아래 외따로 앉아 있는 추운 날 붉고 뜨거운 손이 얼굴을 어루만진다 혼자 불타다가 사그라지고 다시 타오르는 단풍나무 한그루의 세상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는 순간이 있고 떨어져서도 여전히 화끈거리는 단풍잎과 멍하니, 갇힌 사람이 있고 인간의 습성을 비웃으며 서서히 아웃되는 새떼들이 있다
단풍을 보면서/ 조태일
내장산이 아니어도 좋아라 설악산이 아니어도 좋아라
야트막한 산이거나 높은 산이거나 무명산이거나 유명산이거나 거기 박힌 대로 버티고 서 제 생긴 대로 붉었다 제 성미대로 익었다
높고 푸른 하늘 아니더라도 낮고 충충한 바위하늘도 떠받치며 서러운 것들 저렇게 한번쯤만 꼭 한번쯤만 제 생긴 대로 타오르면 될거야 제 성미대로 피어보면 될거야
어린 잎새도 청년 잎새도 장년 잎새도 노년 잎새도 말년 잎새도 한꺼번에 무르익으면 될 거야 한꺼번에 터지면 될 거야
메아리도 이제 살지 않는 곳이지만 이 산은 내 산이고 니 산인지라 저 산도 내 산이고 니 산인지라
단풍 편지/ 이제인
불현듯 다녀가라는 편지 받고 씁니다 포기할 수도 쉽게 다가갈 수도 없는 먼 허공의 거리 그 아득함을 글자로나마 채우겠다는 것인지 쓰고 또 지우고 씁니다 하늘허리를 두르고도 남을 빈 말들의 행렬 다시 한 자 한 자 지워 나갑니다 마지막 남은 한 문장 화석이 된 붉은 시간의 잎들 그대 가슴에도 그 불멸이 자라고 있겠지
오늘밤은 꼭 그대 거기 붉게 물든 한 그루 단풍나무로 서 있어야 하겠습니다
단풍, 혹은 가슴앓이/ 이민우
가슴앓이를 하는 게야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대낮부터 낮 술에 취할 리가 없지
삭이지 못한 가슴 속 붉은 반점 석양으로 타오르다 마침내 마침내 노을이 되었구나
활활 타올라라 마지막 한 잎까지 아쉬워 아쉬워 고개 떨구기엔 가을의 눈빛이 너무 뜨겁다
붉은 잎/ 류시화
그리고는 하루가 얼마나 길고 덧없는지를 느끼지 않아도 좋을 그 다음 날이 왔고 그날은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 붉은 잎, 붉은 잎, 하늘에 떠가는 붉은 잎들 모든 흐름이 나와 더불어 움직여가고 또 갑자기 멈춘다 여기 이 구름들과 끝이 없는 넓은 강물들 어떤 섬세하고 불타는 삶을 나는 가지려고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졌었다, 그렇다,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하찮았던가, 여기 이 붉은 잎, 붉은 잎들 허공에 떠가는 더 많은 붉은 잎들 바람도 자고 물도 맑은 날에 나의 외로움이 구름들을 끌어 당기는 곳 그것들은 멀리 있다. 더 멀리에 그리고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 그것들을 겨울 하늘 위에 소용돌이치게 하고 순식간에 차가운 얼음 위로 끌어내린다
속단풍 든다/ 이명수
단풍 때문에 가을 한철 술에 젖어 살았다 화양동 계곡 너럭바위에서 계룡산 민박집 층층나무 아래서 함양 읍내 선술집에서 마시고 또 마셨다 혼자서, 여럿이서 노래를 불렀다 ㅡ앞남산 황국단풍은 구시월에 들고요 이네 가슴 속단풍은 시시때때로 든다 노래를 불러도 가슴이 시리다 젊은 날엔 술기운을 못 이겨 얼굴이 단풍 빛깔이었는데 나이 들면 술기운이 가슴으로 파고드는 것일까 사시사철 붉은 미친 단풍 때문에 내 속의 그 요물 때문에 요즘엔 시시때때로 속단풍이 든다
열매 도둑 단풍 도둑 / 하종오
며칠 만에 돌아와 집 안 둘러보니 풀들이 밟혀 작은 길 생겨나 있다 그 새로 난 작은 길 가보니 은행나무 아래서부터 감나무 아래로 가서 멎었다가 대추나무 아래로 가서 멎었다가 뒤란 둔덕까지 가서 멎어 있고 나무마다 가지에 열매 하나 없다 우리 집에는 대문이 없는 데도 올해도 누가 집 뒤에 트럭 대놓고 들어와 대추와 감과 은행 싹 털어 싣고 갔다 단풍 들 무렵이면 내가 집 나가는 짓거리 알고 있는 이웃이 와서 한 짓거리 아니라면 해마다 때 잘 맞출 순 없는 법이지만 혐의를 품지 않기로 한다 나도 산천에는 대문이 없다는 걸 알고 함부로 이곳 저곳 드나들며 나무들이 잎에 맺은 색깔들 눈독 들여와서 마음에 한 자리 깔았으니 피장파장 아닌가 그 새로 난 작은 길 발자국 맞춰 걸어보니 내 걸음 너비와 똑같다
Take Me Home / Phil Coulter (Sea Of Tranquility Alb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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