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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2017년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시부문) 본문

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2017년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시부문)

시낭송행복플러스 2017. 1. 6. 17:17

2017년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시부문)





갈라파고스




김태인




어둠이 입술에 닿자 몸 안의 단어들이 수척해졌다 야윈 몸을 안고 섬 밖을 나갔다가 새벽이 오면 회귀하는 조류(潮流), 금이 간 말에서 아픈 단어가 태어나고 다 자란 말은 눈가 주름을 열고 떠나갔다



남겨진 말의 귀를 열면 치어들이 지느러미를 털며 들이 닥쳤다.은어(隱語)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욕설이 귀를 깨문 몸 안에 손을 넣어 상한 심경을 꺼내 놓자 말수 줄은 언어의 생식기는 퇴

화되어 갔다



파도를 멀리 밀어낸 밤은 등대를 잡고 주저앉았다 부레를 떼어낸 언어는 외딴섬에 스스로를 격리시켰다 발굽에 물갈퀴가 생기고 단어에 부리가 자랐다 비늘이 깃털로 변해 조류(鳥類)로 진화했지만 텅 빈 죽지에 감춘 내재율을 버리지는 못하였다



아주 오래된 하늘에 운율이 돌면 첫 문장은 가슴지느러미부터 따뜻해졌다 야윈 말들이 하나 둘 돌아온 섬은 언어의 기원에 종말을 고하고, 밤은 더 이상 섬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동쪽으로 흘러든 난류는 바다거북 등껍질에서 불가사의한 문자를 캐고 암염처럼 굳어버린 죽은 언어를 떼내었다



남쪽 염전에서는 느린 운율과 음가들이 뿔 고동의 귓가에서 보송보송 말라갔다 새벽이 되어 방에 불을 끄면 되살아난 단어들이 몸 안에 환한 섬을 산란하는 것이었다




*갈라파고스 - 찰스 다윈이 발견한 섬 혹은 제도.






- 2017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꽃게



최병철




장손은 섬이었다

할아버지가 펼쳐놓은 바다에 담겨 있던 당신

잠시 뭍에서 맡은 쇠 냄새만

해안선을 따라 옆으로 옆으로 맴돌고 있었다

바다의 모퉁이에 헐렁하게 용접되어 있었지만

기운 기둥을 일으켜 촘촘하게 그물을 걸고

부력으로 집안을 밀어 올렸다

뱃머리가 바다를 가를 때마다

철공소에서 대문을 만들었던 시간들이 솟구쳐 올랐다

가풍의 출입을 철대문으로 막고자 했는지 모르겠다

배를 저어갈 때 방향을 잡아 주던 어머니가

물 밑으로 가라앉고

철의 껍질에서 탈피했다

조금씩 자유로워질 때쯤

딱딱해진 가슴 위로 그물을 펼치고

휑한 구멍을 꿰매고 있었다

물때를 기다렸던 밤

팽팽한 수면을 찢고

그렁그렁 달빛이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바다가 심심해지면 안부가 궁금해지는 법

기다림만 키우다 통발에 자신을 가두던 당신

절단기로 섬을 해체하고

배를 수평선 바깥으로 몰아 마지막 항해를 시작했지만

집게발이 파도를 물고 놓지 않는다






- 2017 경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고래를 격려하며



김예진




외벽에 녹슨 고래 몇 마리

물 바깥으로 나와 숨을 쉰 흔적

그 숨을 찾는 심장소리가 손끝에서 떨렸다



혼신을 다해 호기롭게 살았을

먼 우주를 되짚어도 더 이상의 숨은 없다



때때로 바람이었다가 절벽이었다가

수세기의 흔적이

수 천 년 거리에서

천변 반구대를 서성였을



내세의 염원과 사랑을 갈구하는 수단이 손아귀 힘이었다면



피눈물로 쪼아서 새긴 그 기원이

울음에 갇혀 해답을 기다리는 동안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늙은 고래가 볼모로 잡혀있다

녹슨 세월이 한데 엉겨 붙어서



아직 물을 건너지 못한 배고픔과 서러움

매질과 학대와 손가락질

슬픈 작살에 핏물이 번지고

뼈와 살이 바람으로 흩어지고



다른 행성에 잘못 온 것처럼

가압류 딱지가 붙어버린

고래의 적막은 한겨울처럼 쓸쓸하고

세상의 기억은 겨울 끝에 머물러 있다




- 2017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미역귀



성영희




미역은 귀로 산다

바위를 파고 듣는 미역줄기들

견내량 세찬 물길에 소용돌이로 붙어살다가

12첩 반상에 진수(珍羞)로 올려 졌다고 했던가

깜깜한 청력으로도 파도처럼 일어서는 돌의 꽃

귀로 자생하는 유연한 물살은

해초들의 텃밭 아닐까 



미역을 따고나면 바위는 한동안 난청을 앓는다

돌의 포자인가,

물의 갈기인가, 움켜쥔 귀를 놓으면

어지러운 소리들은 수면 위로 올라와 

물결이 된다 

파도가 지날 때마다

온몸으로 흘려 쓰는 해초들의 수중악보

흘려 쓴 음표라고 함부로 고쳐 부르지 마라

얇고 가느다란 음파로도 춤을 추는 

물의 하체다



저 깊은 곳으로부터 헤엄쳐 온 물의 후음이

긴 파도를 펼치는 시간

잠에서 깬 귀들이 쫑긋쫑긋 햇살을 읽는다



물결을 말리면 저런 모양이 될까

햇살을 만나면 야멸치게 물의 뼈를 버리는

바짝 마른 파도 한 뭇






- 2017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백색소음



이다희




조용히 눈을 떠요. 눈을 뜰 때에는 조용히 뜹니다. 눈꺼풀이 하는 일은 소란스럽지 않아요. 물건들이 어렴풋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덩어리에 날이 생기죠. 나는 물건들과의 이러한 친교에 순응하는 편입니다.



벽에 붙은 선반에 대하여,

나에게 선반은 평평하지만 선반 입장에서는

필사의 직립(直立)이 아니겠습니까?



옆집에서는 담을 높이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점점 높아지는 담에 대하여, 시멘트가 채 마르기 전에 누군가 적어 놓는 이름에 대하여. 며칠째, 습한 날씨가 계속되고 투명한 문신 같은 이름이 피부에 내려앉습니다.

피부가 세상에 가장 먼저 나가는 마중이라면

나는 이 마중에 실패하는 기분이 듭니다. 나는 이 습기에 순응합니다.



하지만 만약 손에 닿지도 않은 컵이 미끄러진다면

컵을 믿겠습니까? 미끄러짐을 믿겠습니까?



유일한 목격자로서

이 비밀을 어떻게 옮겨 놓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이 습기는 누구의 이름입니까.



눈꺼풀을 닫아도 닫아지지 않는 눈이

내가 사라지고도 내 곁을 지키는 잠이

오래 나를 지켜봅니다.







- 2017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각시거미



이삼현




그녀와 나 사이,

서먹해진 간격에 집을 지은 거미

한 점 침묵으로 매달렸다

말끝을 세운 몇 가닥 발설이 한데 얽혀 덫이 되고

 

하루, 이틀, 사흘

무엇을 먹었는지 마셨는지 소식도 없이 제자리에 멈춰있다



나는 여문 것을 좋아하고

그녀는 부드러운 걸 좋아하지만 거미의 식성은 육식성이다

단단한 저녁이 말랑말랑해진 태양의 육즙을 천천히 삼키는 동안 거미는

한마디 미동도 없이 어두워졌다



몰래 들여다봐도 내통도 없다

팽팽하게 벌어진 틈새를 붙잡고

며칠 째 끈적끈적한 긴장의 끈을 당기는 저 고집은 불통이다



꼭 돌아올 거라고 활짝 열어둔 오늘이 무음無音으로 지고

내일의 가지에 또 무슨 꽃이 피려나

마음은 나팔처럼 불 수가 없다



경계를 풀고 다가올

기척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순간이 쉼표도 없이 기다림으로 이어지고



죽은 듯 산 듯

다시 낮달이 떴다







- 2017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빅풋

 

석민재

 

 

군함처럼 큰 발을 끌고

아버지가 낭떠러지까지

오두막집을 밀고 갔다가

밀고 왔다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스텝을 맞추며

말기 암, 엄마를 재우고 있다

죽음을 데리고 놀고 있다

죽을까 말까 죽어줄까 말까

엄마는 아빠를 놀리고 있다

아기처럼 엄마처럼

절벽 끝에서 놀고 있다







- 2017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윤장대



김성신




삼월 삼짓날은 윤장대를 돌리는 날

풍경소리 곱발 세우고

산자락은 그늘을 등지고 좌정한다

108배 올리던 법당에서

굽은 허리와 무릎 뼈 석탑처럼 일으켜 세우고

윤장대 돌리는 어머니의 마음에는

묵은 발원이 한 각씩 깊어진다

상현달 달무리 지는 밤

아이의 울음소리 희미하게 살아나고

안간힘을 토해내던 흑백의 한 생

몸속 경(經)이 된 통증을

한 올 한 올 부풀리니

저만큼 솔바람에 가슴 쓸리기도 해

앞뒤 없는 회한과 갈망은

두 손 맞잡고

배웅하듯

한 곳을 바라보니

이마 위로 맺힌 땀방울

눈물의 동의인양 하염없이 흐른다

더 두툼해질 법문의 책장에

줄 맞추어 반듯하게 들어가 있을

어머니의 비워낸 몸을

나는 가만히 부축하여본다.



 



- 2017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스웨터



황성용




엄마 영정사진을 찍는 날



일생의 좌중을 한 번에 멈추고 그 안에서 골몰히 앞을 바라보는 한방의 시선, 시장 냄새도 들어간다



느슨했던 안이 넘어졌는지 엄마의 얼굴이 카메라 앞에서 손님 쪽으로 살짝 기운다



엄마 스스로 올올이 물 수 있는 어금니 하나로 얼굴을 살짝 들어 올린다 힘들었던 무게는 내리고, 쪼그렸던 다리는 반듯이 편다



푸르른 날과 무성한 날을 곱해도 영이 되는 적자의 숲에서 내려오지 못해 항상 엄마의 앞치마는 땀으로 젖어 있다



비누칠을 해도 빠지지 않을 때 방망이질의 쓰임에 따라 한 방에 끝내려고 사진사는 필요 없는 각도를 버린다



버릴 컷을 버려진 시간으로 남아 있을 때 엄마는 살림의 다이어트를 위해 땀방울 하나하나 털실로 꿰매는 절약 스웨터(sweater)



코가 빠져도 스웨터의 구멍을 버리지 않는 센스, 엄마는 유산의 단추 하나를 남겨둔다



나는 아침을 먹기 전에 빼빼한 삶의 스웨터로 찍힌 영정사진을 찾으러 간다






- 2017 광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질감



김순옥




방을 빼라는 집

주인의 목소리가 뜨거워

엉뚱한 방에 들어가 누워보아요

문지방에 끼인 돌멩이가 으스러져요

감긴 눈을 씹었어요



생선꼬리라도 주세요



돌멩이가 입 안에서 굴러다녀요

미안해요 뱉을 수가 없어요

입 깊숙이 밀어 넣어 볼까요?



늙은 복숭아 껍질에 돋은 거웃이

천일동안 타고 있대요

꽃을 달고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요



노랗게 곪아가는 눈

저만치

나는 엄마보다 더 늙었고

낯익은 젊은 여자 하나

생뚱맞은 얼굴로 거울을 빠져 나가요



불 꺼진 방 아랫목에 우두커니

앉아 있어요






- 2017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잔등노을



정연희




소잔등에 부르르

바람이 올라타고 있다

곱슬거리는 바람을 쫓는 꼬리는

등뼈를 타고 나간 장식

억센 풀은 뿔이 되고

오래 되새김한 무료는 꼬리 끝에서 춤춘다



스프링을 닮은 잔등 속 간지러움은

온갖 풀끝을 탐식한 벌

한 마리 꽃의 몸속에 피는 봄

연한 풀잎이 키운 한 마리 소는

쌓아 놓은 풀 더미 같고

잔등은 가혹한 수레의 우두머리 같다



논두렁 길 따라 비스듬히 누운

온돌방 같은 소 한 마리

눈 안에 풀밭과

코뚜레 꿴 굴레의 말(言)을 숨기는

저 순응의 천성

가지런한 빗줄기가 껌벅 껌벅거린다



융단처럼 펼쳐놓은

노을빛 잔등이 봄빛으로 밝다

주인 닮은 뿔처럼 몸 기우는 날은

금방 쏟아질 것 같은 잔등의 딱지가

철석철석 박자를 맞추고

저 불그스름한 노을은

유순한 소의 엉덩짝을 산처럼 넘는다






- 2017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페인트 공



성영희




그에게 깨끗한 옷이란 없다

한 가닥 밧줄을 뽑으며 사는 사내

거미처럼 외벽에 붙어

어느 날은 창과 벽을 묻혀오고

또 어떤 날은 흘러내리는 지붕을 묻혀 돌아온다

사다리를 오르거나 밧줄을 타거나

한결같이 허공에 뜬 얼룩진 옷

얼마나 더 흘러내려야 저 절벽 꼭대기에

깃발 하나 꽂을 수 있나



저것은 공중에 찍힌 데칼코마니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작업복이다

저렇게 화려한 옷이

일상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끊임없이 보호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리 거미가 정글을 탈출할 때

죽음에 쓸 밑줄까지 품고 나오듯

공중을 거쳐 안착한 거미들의 거푸집



하루 열두 번씩 변한다는 카멜레온도

마지막엔 제 색깔을 찾는다는데

하나의 직업과 함께 끝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가 내려온 벽면에는 푸른 싹이 자라고

너덜거리는 작업복에도

온갖 색의 싹들이 돋아나 있다






- 2017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두꺼운 부재(不在)

                 

추프랑카

 



안 오던 비가 뜰층계에도 온다 그녀가 마늘을 깐다 여섯 쪽 마늘에 가랑비



육손이 그녀가 손가락 다섯 개에 오리발가락 하나를 까면 다섯 쪽 마늘은 쓰리고, 오그라져 붙은 마늘 한 쪽에 맺히는 빗방울, 오리발가락 다섯 개에 손가락 하나를 까면 바람비는 뜰층계에 양서류처럼 뛰어내리고, 타일과 타일 사이 당신 낯빛 닮은 바랜 시멘트, 그녀가 한사코 층계에 앉아 발끝을 오므리고 마늘을 깐다



매운 하늘을 휘젓는 비의 꼬리



마늘을 깐다 한 줌의 깊이에 씨를 묻고, 알뿌리 키우던 마늘밭에서 흙 탈탈 털어낸, 당신 없는 뜰층계에서 통증의 꼬리 하나씩 눈을 뜨며 낱낱이 톨 쪼개고 나와야 할 마늘쪽들, 층계 갈라진 틈 틈으로 촘촘하게 내리는 비, 집어넣는 비, 비의 꼬리도 꿰맬 듯 웅크려 앉아 그녀가 마늘을 깐다. 묵은 마늘껍질처럼 벗겨져, 하얗게, 날아가 버리는 맨종아리의 육남매 비안에 스며 있는 그늘의 표정으로 여섯 해, 꿈속 수면에 번지던 당신 뜰층계에 불쑥 붐비는 당신의 이름, 아멘 아멘 아멘 마늘은 여섯 쪽이고 육손이 그녀 뒤뚱거리며, 오리발가락 여섯 개에 손가락 여섯 개를 깐다



세 시에 한번 멎었다가 생각난 듯 쿵, 쿵 아멘을 들이받으며 아직 다 닳지 않은 비가, 다시 여러 가닥으로 쪼개진다







- 2017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목판화



진창윤




목판 위에 칼을 대면 

마을에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골목 안쪽으로 흘러들어 고이는 풍경들은 늘 배경이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여자의 

문 따는 소리를 들으려면 손목에 힘을 빼야 한다 

칼은 골목을 따라 가로등을 세우고 지붕 위에 기와를 덮고 

용마루 위의 길고양이 걸음을 붙들고 

담장에 막혀 크는 감나무의 가지를 펼쳐준다

나는 여자의 발소리와 아이의 

소리 없는 울음을 나무에 새겨 넣기 위해

밤이 골목 끝에서 떼쓰며 우는 것도 잊어야 한다

불 꺼진 문틈으로 냄비 타는 냄새가 새어나오더라도

칼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쯤 되면 

밤 열두 시의 종소리도 새겨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여백은 언제나 좁아서 

칼이 지나간 움푹 팬 자리는 서럽고 아프다

지붕 위로 어두운 윤곽이 드러나면 드문드문 송곳을 찍어

마치 박다 만 못 자국처럼 별을 새겨 넣는다

드디어 깜깜한 하늘에 귀가 없는 별이 뜬다

여자는 퉁퉁 불은 이불을 아이의 턱밑까지 덮어주었다

내 칼이 닿지 않는 곳마다 눈이 내리고 있다






- 2017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허공에서 더 깊어지는 추위



김낙호




세 길 높이 배관 위

긴 칼 휘두르는 단단한 추위와 맞선다

 

방패는,

작업복 한 장의 두께

빈곤의 길이를 덮을 수 없는 주머니 속에서

길 없는 길을 찾는 추위에 쩍쩍 묻어나는 살점

더 먼 변두리의 울음소리를 막아보려

등돌린 세상처럼 냉골인 둥근 관을 온몸으로 데운다



두려움의 크기 따라 느리게

혹은, 더 느리게

허공을 차는 발바닥의 양력揚力으로 기는 자벌레



수평으로 떠 있는 몸이 공중을 써는 동안

바람은,

밀도 낮은 곳만 파고드는 야비한 마름



풍경風磬이 될 수 없는 공구들 부딪치는 소리

눈앞에 튀어 올랐던 땅의 단내가 목구멍을 채우는,

숨죽였던 모골이 축축한 닭의 볏이 될 때마다

날개 없는 포유류가 새가 된 적 없다는 걸

한 발 느리게 깨닫는다



떨어져 나갔다 다시 매달린 간肝으로부터

소름의 갈기가 잦아드는 한숨



자꾸만 밀어내는 세상의 복판을 자주 헛짚어

복부 근육으로 변두리를 붙잡고 살아내야 한다는 것,



허공을 기는 힘이 연소될 때마다

그나마 조금 환해지는 하루






- 2017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진단



신동혁




머리를 자르면 물고기가 된 기분입니다

나는 종교가 없고 마지막엔 바다가 온다는 말을,

소금기가 남은 꼬리뼈를 믿습니다

훔쳐온 것들만이 반짝입니다

지상의 명단에는 내가 없기에

나는 나의 줄거리가 됩니다

나는 맨발과 어울립니다

액자를 훔치면 여름이 되고 비둘기를 훔치면 횡단보도가 되는

낯선 버스에서 승객들이 쏟아집니다

멀리서 보면 선인장 더미 같습니다

서로를 껴안자 모래가 흐릅니다

모래가 나의 모국어가 아니듯

빈 침대는 바다에 대한 추문입니다

나는 모르는 햇빛만을 받아 적습니다

혼잣말을 엿들을 때 두 귀는 가장 뜨겁습니다

지도를 꺼내어 펼쳐봅니다

처방전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말을 듣습니다

숨을 쉴 때마다

나도 모르게 호주머니가 깊어집니다






- 2017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공복



김한규






당신이 하고 있는 무엇

가만히 있게 가만히 두지 않는 시간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 나왔네요.

아니면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 왔습니다.



먼지가 부풀며 피에 섞인다

아스팔트가 헤드라이트를 밀어내기 시작하고

한 마디를 끝낸 입술이



냉동고 속에서 굳는다

언 것이 쌓이기 시작하자

흔들리던 빈속이 쏟아져 내린다



무엇을 하기 위해 당신은

약봉지를 잊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고

가지 말아야 할 곳이 보인다



죽은 나무 위에서 늦은 밥을 먹을 때

문은 닫히는 소리를 낸다



밝아올 것이라는 말을 지워버린

아침에는 감꽃이 떨어지고

눈물을 말리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을 하고 나면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

끝났습니다.



아니면 이런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연락하겠습니다.






- 2017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귀촌



정연희




귀가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멀고 가까운 말들도

촌에서는 하나로 연결된 귀가 된다

귀걸이처럼 빛나는 소문들

귀가 제일 빠른 곳은 촌이다

특용작물을 심은 노총각의 이야기, 젊은 며느리와 늙은 시어머니와 다국적 갈등, 파리 한 마리와 한나절을 놀았다는 과부댁, 허리가 점점 늦가을 풀포기처럼 구부러지는 재 너머 노인, 합죽의 입 꼬리에서 뛰어오는 손자들 부러운 마음 감추고 듣는 독거노인들 이야기가 점심 물린 마을회관에 가득하다. 토지수용 소문에 동네가 술렁이고 쇠약한 용돈을 먹고 약장사가 지나가고 나면 촌에는 보일러 공기구멍에 집을 짓는 새와 부엌이 놀이터인 쥐가 퍼트리는 소문이 있다

반상회가 끝난 자정 무렵

민화투 점수로 오고가는

소문의 끄트머리들이

텅 빈 까치집으로 들어간다

폐가는 집 비운 소문으로 흉흉하고

논두렁에는 논두렁 소문이 길게 늘어나고

어쩌다 주춤했던 귀들도

오일장 다녀 온 뒤로 다시 무성해지는

이발관 그림 같은 풍경에 뛰어든 사람들

밤이 빨리 찾아오는 촌 풍경에

바쁜 귀가 몰입해 있다






- 2017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애인 



유수연




애인은 여당을 찍고 왔고 나는 야당을 찍었다

서로의 이해는 아귀가 맞지 않았으므로 나는 왼손으로 문을 열고 너는 오른손으로 문을 닫는다

손을 잡으면 옮겨오는 불편을 참으며 나는 등을 돌리고 자고 너는 벽을 보며 자기를 원했다

악몽을 꾸다 침대에서 깨어나면 나는 생각한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애인을 바라보며 우리의 꿈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수많은 악몽 중 하나였지만 금방 잊혀졌다

벽마다 액자가 걸렸던 흔적들이 피부병처럼 번진다 벽마다 뽑지 않은 굽은 못들이 벽을 견디고 있다

더는 넘길 게 없는 달력을 바라보며 너는 평화, 말하고 나는 자유, 말한다

우리의 입에는 답이 없다 우리는 안과 밖

벽을 넘어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나를 견디고 너는 너를 견딘다

어둠과 한낮 속에서 침대에 누워있었다 티브이를 끄지 않았으므로 뉴스가 나오고 있다







- 2017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전쟁의 시간



주민현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치며 싸락싸락 소리가 났다.

라디오에서 전쟁의 종식을 알리는 앵커의 목소리가 지지직거리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쁨과 안도가 터무니없이 먼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어두운 언덕을 넘어가고 있는 군인들의 긴 행렬을 떠올렸다

바게트 굽는 냄새가 식탁 위로 흘러 넘쳤다



하지만 불안이 커튼처럼 남겨져 있었다



어쨌거나 다시 자랄 것이다

식물이나, 아이나, 어둠 속에 수그린

수련이나, 오래 구겨져 있던 셔츠 같은 것이

교사나 수렵꾼 같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생활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뜯어진 커튼처럼 그렇게 남겨져 있었다



어머니는 인간이 물고기로부터 태어난다고 믿었다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끝내 믿을 수 없어 했다



이곳에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반쯤만 돌아온 사람도 있었다

식은 총구에서 나는 싸늘한 냄새를 맡으며

수프를 먹었고, 기도를 했고, 달력을 넘기며

고작 이 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했다



칼로 가른 물고기 뱃속에는 구슬이 가득했다

종종 정신이 돌아오는 늙은 어머니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종려나무야, 다른 신발을 쥐고 태어난 깨끗한 발아,

이것을 좀 보렴, 이렇게 아름답잖니



신은 언제나 우리의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단다



어머니는 자주 누워 있었고 집 밖에 내어 놓은 의자는 비에 젖었다

전쟁이 끝나고 좀도둑 떼가 기승을 부린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곧 사월이 오면 먹을 게 좀 생길 거다

이웃집 사람들과 매일 대화를 했다



이 동네를 떠나세요, 아직 젊으니까 도시로 가면 여기보단 지내기가 나을 거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워서 중얼거리는 어머니는 조금씩 물고기의 형상을 닮아 갔다



오빠 마구간에서 새끼 양들이 태어났어

이상한 일이다, 신의 증거 같은 것일까?

그 양들은 옆집에서 도망친 가난한 슬픔일 뿐이란다



사는 게 지옥 같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아직 지옥엔 도달하지도 않았는걸요



사월에도 눈이 내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다시 학교에 갔고

곳곳에 무너진 건물이 다시 건축되고 있었다



가는 물줄기 안에서 물고기 몇 마리가

더 커다란 물고기에게 잡아먹히고 있었다









- 2017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소잔등에 부르르

바람이 올라타고 있다

곱슬거리는 바람을 쫓는 꼬리는

등뼈를 타고 나간 장식

억센 풀은 뿔이 되고

오래 되새김한 무료는 꼬리 끝에서 춤춘다



스프링을 닮은 잔등 속 간지러움은

온갖 풀끝을 탐식한 벌

한 마리 꽃의 몸속에 피는 봄

연한 풀잎이 키운 한 마리 소는

쌓아 놓은 풀 더미 같고

잔등은 가혹한 수레의 우두머리 같다



논두렁 길 따라 비스듬히 누운

온돌방 같은 소 한 마리

눈 안에 풀밭과

코뚜레 꿴 굴레의 말(言)을 숨기는

저 순응의 천성

가지런한 빗줄기가 껌벅 껌벅거린다



융단처럼 펼쳐놓은

노을빛 잔등이 봄빛으로 밝다

주인 닮은 뿔처럼 몸 기우는 날은

금방 쏟아질 것 같은 잔등의 딱지가

철석철석 박자를 맞추고

저 불그스름한 노을은

유순한 소의 엉덩짝을 산처럼 넘는다






- 2017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페인트 공



성영희




그에게 깨끗한 옷이란 없다

한 가닥 밧줄을 뽑으며 사는 사내

거미처럼 외벽에 붙어

어느 날은 창과 벽을 묻혀오고

또 어떤 날은 흘러내리는 지붕을 묻혀 돌아온다

사다리를 오르거나 밧줄을 타거나

한결같이 허공에 뜬 얼룩진 옷

얼마나 더 흘러내려야 저 절벽 꼭대기에

깃발 하나 꽂을 수 있나



저것은 공중에 찍힌 데칼코마니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작업복이다

저렇게 화려한 옷이

일상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끊임없이 보호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리 거미가 정글을 탈출할 때

죽음에 쓸 밑줄까지 품고 나오듯

공중을 거쳐 안착한 거미들의 거푸집



하루 열두 번씩 변한다는 카멜레온도

마지막엔 제 색깔을 찾는다는데

하나의 직업과 함께 끝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가 내려온 벽면에는 푸른 싹이 자라고

너덜거리는 작업복에도

온갖 색의 싹들이 돋아나 있다






- 2017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두꺼운 부재(不在)

                 

추프랑카

 



안 오던 비가 뜰층계에도 온다 그녀가 마늘을 깐다 여섯 쪽 마늘에 가랑비



육손이 그녀가 손가락 다섯 개에 오리발가락 하나를 까면 다섯 쪽 마늘은 쓰리고, 오그라져 붙은 마늘 한 쪽에 맺히는 빗방울, 오리발가락 다섯 개에 손가락 하나를 까면 바람비는 뜰층계에 양서류처럼 뛰어내리고, 타일과 타일 사이 당신 낯빛 닮은 바랜 시멘트, 그녀가 한사코 층계에 앉아 발끝을 오므리고 마늘을 깐다



매운 하늘을 휘젓는 비의 꼬리



마늘을 깐다 한 줌의 깊이에 씨를 묻고, 알뿌리 키우던 마늘밭에서 흙 탈탈 털어낸, 당신 없는 뜰층계에서 통증의 꼬리 하나씩 눈을 뜨며 낱낱이 톨 쪼개고 나와야 할 마늘쪽들, 층계 갈라진 틈 틈으로 촘촘하게 내리는 비, 집어넣는 비, 비의 꼬리도 꿰맬 듯 웅크려 앉아 그녀가 마늘을 깐다. 묵은 마늘껍질처럼 벗겨져, 하얗게, 날아가 버리는 맨종아리의 육남매 비안에 스며 있는 그늘의 표정으로 여섯 해, 꿈속 수면에 번지던 당신 뜰층계에 불쑥 붐비는 당신의 이름, 아멘 아멘 아멘 마늘은 여섯 쪽이고 육손이 그녀 뒤뚱거리며, 오리발가락 여섯 개에 손가락 여섯 개를 깐다



세 시에 한번 멎었다가 생각난 듯 쿵, 쿵 아멘을 들이받으며 아직 다 닳지 않은 비가, 다시 여러 가닥으로 쪼개진다







- 2017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목판화



진창윤




목판 위에 칼을 대면 

마을에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골목 안쪽으로 흘러들어 고이는 풍경들은 늘 배경이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여자의 

문 따는 소리를 들으려면 손목에 힘을 빼야 한다 

칼은 골목을 따라 가로등을 세우고 지붕 위에 기와를 덮고 

용마루 위의 길고양이 걸음을 붙들고 

담장에 막혀 크는 감나무의 가지를 펼쳐준다

나는 여자의 발소리와 아이의 

소리 없는 울음을 나무에 새겨 넣기 위해

밤이 골목 끝에서 떼쓰며 우는 것도 잊어야 한다

불 꺼진 문틈으로 냄비 타는 냄새가 새어나오더라도

칼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쯤 되면 

밤 열두 시의 종소리도 새겨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여백은 언제나 좁아서 

칼이 지나간 움푹 팬 자리는 서럽고 아프다

지붕 위로 어두운 윤곽이 드러나면 드문드문 송곳을 찍어

마치 박다 만 못 자국처럼 별을 새겨 넣는다

드디어 깜깜한 하늘에 귀가 없는 별이 뜬다

여자는 퉁퉁 불은 이불을 아이의 턱밑까지 덮어주었다

내 칼이 닿지 않는 곳마다 눈이 내리고 있다






- 2017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허공에서 더 깊어지는 추위



김낙호




세 길 높이 배관 위

긴 칼 휘두르는 단단한 추위와 맞선다

 

방패는,

작업복 한 장의 두께

빈곤의 길이를 덮을 수 없는 주머니 속에서

길 없는 길을 찾는 추위에 쩍쩍 묻어나는 살점

더 먼 변두리의 울음소리를 막아보려

등돌린 세상처럼 냉골인 둥근 관을 온몸으로 데운다



두려움의 크기 따라 느리게

혹은, 더 느리게

허공을 차는 발바닥의 양력揚力으로 기는 자벌레



수평으로 떠 있는 몸이 공중을 써는 동안

바람은,

밀도 낮은 곳만 파고드는 야비한 마름



풍경風磬이 될 수 없는 공구들 부딪치는 소리

눈앞에 튀어 올랐던 땅의 단내가 목구멍을 채우는,

숨죽였던 모골이 축축한 닭의 볏이 될 때마다

날개 없는 포유류가 새가 된 적 없다는 걸

한 발 느리게 깨닫는다



떨어져 나갔다 다시 매달린 간肝으로부터

소름의 갈기가 잦아드는 한숨



자꾸만 밀어내는 세상의 복판을 자주 헛짚어

복부 근육으로 변두리를 붙잡고 살아내야 한다는 것,



허공을 기는 힘이 연소될 때마다

그나마 조금 환해지는 하루






- 2017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진단



신동혁




머리를 자르면 물고기가 된 기분입니다

나는 종교가 없고 마지막엔 바다가 온다는 말을,

소금기가 남은 꼬리뼈를 믿습니다

훔쳐온 것들만이 반짝입니다

지상의 명단에는 내가 없기에

나는 나의 줄거리가 됩니다

나는 맨발과 어울립니다

액자를 훔치면 여름이 되고 비둘기를 훔치면 횡단보도가 되는

낯선 버스에서 승객들이 쏟아집니다

멀리서 보면 선인장 더미 같습니다

서로를 껴안자 모래가 흐릅니다

모래가 나의 모국어가 아니듯

빈 침대는 바다에 대한 추문입니다

나는 모르는 햇빛만을 받아 적습니다

혼잣말을 엿들을 때 두 귀는 가장 뜨겁습니다

지도를 꺼내어 펼쳐봅니다

처방전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말을 듣습니다

숨을 쉴 때마다

나도 모르게 호주머니가 깊어집니다






- 2017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공복



김한규






당신이 하고 있는 무엇

가만히 있게 가만히 두지 않는 시간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 나왔네요.

아니면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 왔습니다.



먼지가 부풀며 피에 섞인다

아스팔트가 헤드라이트를 밀어내기 시작하고

한 마디를 끝낸 입술이



냉동고 속에서 굳는다

언 것이 쌓이기 시작하자

흔들리던 빈속이 쏟아져 내린다



무엇을 하기 위해 당신은

약봉지를 잊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고

가지 말아야 할 곳이 보인다



죽은 나무 위에서 늦은 밥을 먹을 때

문은 닫히는 소리를 낸다



밝아올 것이라는 말을 지워버린

아침에는 감꽃이 떨어지고

눈물을 말리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을 하고 나면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

끝났습니다.



아니면 이런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연락하겠습니다.






- 2017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귀촌



정연희




귀가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멀고 가까운 말들도

촌에서는 하나로 연결된 귀가 된다

귀걸이처럼 빛나는 소문들

귀가 제일 빠른 곳은 촌이다

특용작물을 심은 노총각의 이야기, 젊은 며느리와 늙은 시어머니와 다국적 갈등, 파리 한 마리와 한나절을 놀았다는 과부댁, 허리가 점점 늦가을 풀포기처럼 구부러지는 재 너머 노인, 합죽의 입 꼬리에서 뛰어오는 손자들 부러운 마음 감추고 듣는 독거노인들 이야기가 점심 물린 마을회관에 가득하다. 토지수용 소문에 동네가 술렁이고 쇠약한 용돈을 먹고 약장사가 지나가고 나면 촌에는 보일러 공기구멍에 집을 짓는 새와 부엌이 놀이터인 쥐가 퍼트리는 소문이 있다

반상회가 끝난 자정 무렵

민화투 점수로 오고가는

소문의 끄트머리들이

텅 빈 까치집으로 들어간다

폐가는 집 비운 소문으로 흉흉하고

논두렁에는 논두렁 소문이 길게 늘어나고

어쩌다 주춤했던 귀들도

오일장 다녀 온 뒤로 다시 무성해지는

이발관 그림 같은 풍경에 뛰어든 사람들

밤이 빨리 찾아오는 촌 풍경에

바쁜 귀가 몰입해 있다






- 2017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애인 



유수연




애인은 여당을 찍고 왔고 나는 야당을 찍었다

서로의 이해는 아귀가 맞지 않았으므로 나는 왼손으로 문을 열고 너는 오른손으로 문을 닫는다

손을 잡으면 옮겨오는 불편을 참으며 나는 등을 돌리고 자고 너는 벽을 보며 자기를 원했다

악몽을 꾸다 침대에서 깨어나면 나는 생각한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애인을 바라보며 우리의 꿈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수많은 악몽 중 하나였지만 금방 잊혀졌다

벽마다 액자가 걸렸던 흔적들이 피부병처럼 번진다 벽마다 뽑지 않은 굽은 못들이 벽을 견디고 있다

더는 넘길 게 없는 달력을 바라보며 너는 평화, 말하고 나는 자유, 말한다

우리의 입에는 답이 없다 우리는 안과 밖

벽을 넘어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나를 견디고 너는 너를 견딘다

어둠과 한낮 속에서 침대에 누워있었다 티브이를 끄지 않았으므로 뉴스가 나오고 있다







- 2017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전쟁의 시간



주민현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치며 싸락싸락 소리가 났다.

라디오에서 전쟁의 종식을 알리는 앵커의 목소리가 지지직거리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쁨과 안도가 터무니없이 먼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어두운 언덕을 넘어가고 있는 군인들의 긴 행렬을 떠올렸다

바게트 굽는 냄새가 식탁 위로 흘러 넘쳤다



하지만 불안이 커튼처럼 남겨져 있었다



어쨌거나 다시 자랄 것이다

식물이나, 아이나, 어둠 속에 수그린

수련이나, 오래 구겨져 있던 셔츠 같은 것이

교사나 수렵꾼 같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생활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뜯어진 커튼처럼 그렇게 남겨져 있었다



어머니는 인간이 물고기로부터 태어난다고 믿었다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끝내 믿을 수 없어 했다



이곳에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반쯤만 돌아온 사람도 있었다

식은 총구에서 나는 싸늘한 냄새를 맡으며

수프를 먹었고, 기도를 했고, 달력을 넘기며

고작 이 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했다



칼로 가른 물고기 뱃속에는 구슬이 가득했다

종종 정신이 돌아오는 늙은 어머니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종려나무야, 다른 신발을 쥐고 태어난 깨끗한 발아,

이것을 좀 보렴, 이렇게 아름답잖니



신은 언제나 우리의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단다



어머니는 자주 누워 있었고 집 밖에 내어 놓은 의자는 비에 젖었다

전쟁이 끝나고 좀도둑 떼가 기승을 부린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곧 사월이 오면 먹을 게 좀 생길 거다

이웃집 사람들과 매일 대화를 했다



이 동네를 떠나세요, 아직 젊으니까 도시로 가면 여기보단 지내기가 나을 거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워서 중얼거리는 어머니는 조금씩 물고기의 형상을 닮아 갔다



오빠 마구간에서 새끼 양들이 태어났어

이상한 일이다, 신의 증거 같은 것일까?

그 양들은 옆집에서 도망친 가난한 슬픔일 뿐이란다



사는 게 지옥 같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아직 지옥엔 도달하지도 않았는걸요



사월에도 눈이 내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다시 학교에 갔고

곳곳에 무너진 건물이 다시 건축되고 있었다



가는 물줄기 안에서 물고기 몇 마리가

더 커다란 물고기에게 잡아먹히고 있었다



- 2017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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