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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고야 (古夜)/ 백석

시낭송행복플러스 2016. 12. 18. 22:44



고야 (古夜)

  백석

  

 

 아배는 타관 가서 오지 않고 산비탈 외따른 집에 엄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 집 뒤로는

어느 산 골짜기에서 소를 잡아 먹는 노나리꾼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거리며 다닌다

 

 날기* 멍석을 져간다는 닭 보는 할미를 차 굴린다는 땅아래 고래 같은 기와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밀에 은금보화가 그득하다는 외발 가진 조마구* 뒷산 어느메도 조마구네 나라가 있어서 오줌누러 깨는 재밤 머리맡의 문살에 대인 유리창으로 조마구 군병의 새까만 대가리 눈알이 들여다 보는 때 나는 이불 속에 자즈러 붙어 숨도 쉬지 못한다

    

 또 이러한 밤 같은 때 시집갈 처녀 막내고모가 고개 넘어 큰집으로 치장감을 가지고 와서 엄마와 둘이 소기름에 쌍심지의 불을 밝히고 밤이 들도록 바느질을 하는 밤 같은 때 나는 아릇목의 삿귀*를 들고 쇠든 밤을 내여 다람쥐처럼 밝어먹고 은행여름*을 인두불에 구워도 먹고 그러다는 이불 위에서 광대넘이를 뒤이고 또 누워 굴면서 엄매에게 윗목에 둘은 평풍의 샛빨간 천두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고모더러는 밝는 날 멀리는 못 난다는 뫼추라기를 잡어달라고 졸으기도 하고

 

  내일같이 명절날인 밤은 부엌에 쩨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 안에서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펴며 조개송편에 달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밤소 팥소 설탕 든 콩가루소를 먹으며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얼마나 반죽을 주무으며 힌가루 손이 되여 떡을 빚고 싶은지 모른다

    

  섣달에 냅입날이 들어서 냅일날 밤에 눈이 오면 이 밤엔 쌔하얀 할미귀신의 눈귀신도 냅일눈을 받노라 못 난다는 말을 든든히 여기며 엄매와 나는 앙궁 위에 떡돌 위에 곱새담* 위에 함지에 버치*며 대냥푼을 놓고 치성이나 드리듯이 정한 마음으로 냅일눈 약눈을 받는다

  이 눈세기 물을 냅일물이라고 제주병에 진상항아리에 채워두고는 해를 묵여가며 고뿔이 와도 배앓이를 해도 갑피기*를 앓아도 먹을 물이다

  

*날기: '낟알'의 평안남도 방언

*니차떡: '찰떡'의 북한어

*조마구: '조막'의 북한어. 주먹보다 작은 물건의 덩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삿귀: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의 가장자리

*은행여름: 은행열매. 여름은 "열매"의 함경도 방언이다

*째듯하니: 환하게

*곱새담: 곱새는 '용마름'의 북한어다. 이엉을 덮은 담을 뜻한다

*버치: 자배기보다 조금 깊고 아가리가 벌어진 큰 그릇

*갑피기: '이질'의 평안북도 방언 



                  ㅡ 『사슴(현대어판)』 더스토리, 2016)




백석 시인/ 본명은 백기행. 1912년 평북 정주 출생. 1929년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1934년 귀국,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하였다.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와 아들」이 당선되었으며, 1935년 시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여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으며, 「통영」「적막강산」「북방」등 그의 대표작들은 실향의식을 한국 고유의 가락에 실어 노래한 향토색 짙은 서정시이다.1957년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발표했다.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으나 지금은 토속적이고 민족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우리나라 대표 시인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광복 후에 고향에 머물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자에 의해 사망연도가 1995년으로 수정되었다.백석은 분단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시인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토속적이고 정겨운 언어로 쓴 시들을 발표하며 우리 민족과 문화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소박한 우리 방언으로 전통적인 세계를 그려낸 백석의 작품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뛰어난 문학성과 민족정신을 통해 깊은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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